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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imental Season>

 
2026. 09. 01 - 09. 22
10:00-16:00 (일,월,공휴일 휴무)
미들맨 갤러리 M (부산시 해운대구 좌동로 35, 1층)
 
전시서문
 
<계절의 문턱에서 마주한 마음의 풍경>
진지수 | 독립 큐레이터
 
최은별 작가의 화면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마음을 흔드는 것은 매끈한 가상의 껍질을 뚫고 피어오르는 내밀한 정서의 파동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회화적 여정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교차하는 모니터 화면의 서늘한 긴장감 속에 있었다. 구글맵의 캡처 화면과 인터넷을 떠도는 웹 이미지, 차가운 도시 거리의 파편들을 수집하여 캔버스에 재배치하던 이전의 작업들은 원본이 사라진 시뮬라크르의 거대한 기계 속에서 길을 잃은 동시대인의 정체성을 묵묵히 증언하는 장치였다. 에어브러시 특유의 차갑고 정교한 그러데이션 뒤로 작가 자신의 신체적 숨결을 지워내며 디지털의 가상성을 은유하던 태도는 시대를 통찰하는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 < Sentimental Season>에서 작가의 시선은 차가운 가상의 지평을 넘어, 그 안에서 박동하는 개인의 장소와 경험, 그리고 그 시공간에 새겨진 내밀한 감각의 지층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소환하는 기억은 과거의 한순간을 박제해 둔 사진첩이 아니다. 물리적 실재와 가상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축적된 기억들은 시각이라는 단일한 감각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형태 너머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감각의 총체다. 풀잎을 흔들며 지나가던 축축한 바람의 냄새, 피부를 감싸던 노을빛의 온도, 귓가를 맴돌던 이름 모를 음악의 파편,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뒤엉켜 가슴속에 일렁이던 찰나의 정동들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작가는 세상을 머릿속의 계산이나 메마른 논리로만 재단하지 않고 온몸으로 겪어 내는 방식을 취한다. 기억을 그대로 복제하는 대신, 그 시절의 공기와 분위기를 감각의 프리즘으로 굴절시키고 재구성하여 캔버스라는 물리적 공간 위에 다시 숨 쉬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적 심화는 붓을 쥐는 작가의 손끝에서 극적인 조형적 변곡점을 맞이한다. 기계적인 매끈함을 자랑하던 에어브러시의 자리에 거칠고 즉흥적인 붓질의 궤적이 맹렬하게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는 사물을 사진처럼 꼼꼼하게 옮겨 적으려는 고전적 사실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다. 화면 속 인물과 배경은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가상의 이미지이지만, 그 위를 지나가는 굵고 투박한 선과 물감의 끈적한 물성은 텅 빈 가상의 공간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에어브러시가 만들어내는 흐릿하고 몽환적인 공간감과 직접적인 붓질이 빚어내는 회화적 거침이 한 화 면에서 조우할 때, 캔버스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훌쩍 뛰어넘어 손으로 만져질 듯한 생생한 감각의 현장이 된다.
전시의 표제작인 대작 <Sentimental Season>은 이러한 변화의 정점을 보여준다. 캔버스 가득 화면을 메우고 있는 짙은 초록빛의 잎사귀들은 식물도감의 묘사가 아니라, 기억의 숲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엽록소의 냄새와 그늘의 서늘함을 시각화한 것이다. 창가에 가만히 앉아 책장을 넘기는 인물의 창백한 얼굴과 그 주변을 감싸는 덩굴식물의 리드미컬한 필선은 관람객의 시선을 조용히 멈춰 세운다. 에어브러시로 아스라이 물들인 창밖의 몽환적인 빛과, 잎사귀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긁어내듯 그어간 붓질의 거친 텍스처는 보는 이로 하여금 고요한 방 안에서 흐르던 시간의 무게와 빗소리 같은 비가시적 청각을 상상하게 만든다. 작가는 감정을 강요하는 서사를 배제한 채, 오직 짙은 녹색의 농담과 밀도 높은 분위기만으로 화면 앞에 선 이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계절의 감각을 깨워낸다.
또 다른 대작 <After the storm>에서는 심리적 지형도의 확장이 더욱 웅장하게 펼쳐진다.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듯 거친 요철을 드러낸 암석 지대와 들판 한가운데, 단발머리의 소녀가 오롯이 서 있다. 발밑으로 굽이치는 바위들의 거친 붓질과 밤하늘 혹은 우주의 성운처럼 펼쳐지는 어두운 대지의 틈새는 혼란스럽고 위태로웠던 내면의 방황을 은유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 황량함 속에 머무르지 않고, 바위틈을 비집고 피어난 작고 하얀 들꽃들과 연둣빛 이끼의 생명력을 섬세한 터치로 덧입힌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묘하게 교차하는 하늘의 완만한 색면은 상처를 견뎌 낸 자만이 맞이할 수 있는 고요한 평온을 선사한다. 거친 질감과 섬세한 필치가 부딪히며 만들어 내는 시각적 긴장감은, 삶의 흔들림조차 마음에 깃드는 소중한 재료로 끌어안겠다는 작가의 성숙한 내면을 대변한다.
작가의 시선은 거대한 자연의 심상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의 소소한 시공간 속으로도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둥근 모서리의 변형 캔버스에 그려진 <Glide>는 마치 달리는 전철의 차창을 그대로 떼어낸 듯한 독특한 프레임을 취한다. 차창 밖으로 번져가는 붉은 노을빛과 그 빛을 받아 오렌지색으로 물든 객차 안에서, 무릎 위에 책을 얹고 앉아 있는 인물의 모습은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이다. 좌석 옆에 무심하게 놓인 투명 비닐봉지 속 붉은 과일들의 묘사는 눈 시리도록 따뜻하다. 목적지를 향해 미끄러져 가는 전철의 규칙적인 진동과 하루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나른한 피로,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사 들고 가는 과일의 온기가 변형 캔버스의 유려한 곡선 안에서 부드럽게 공명한다. 틀에 박힌 사각형의 프레임을 깨뜨리고 대상의 형태에 맞추어 캔버스를 직조해 낸 작가의 태도는, 기억이란 꽉 짜인 틀에 가둘 수 없이 유연하게 흐르는 것임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Graceful ghost rag>과 <Sunshine & Rain>에서는 음악적 리듬과 자연의 감각이 절묘하게 융합된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 갈대숲 사이로 노란 불빛들이 반딧불이처럼 부유하는 <Graceful ghos t rag>은 제목에서 암시하듯 화면 전체가 우아한 음악의 선율을 타고 흐르는 듯하다. 짙은 남빛과 푸른빛의 층위 위로 흩뿌려진 빛의 파편들은 어둠 속에서도 끝내 길을 잃지 않는 희망의 궤적처럼 반짝인다. 실내의 안락함과 바깥 풍경의 야생성이 하나의 공간에 공존하는 <Sunshine & Rain> 역시 햇살과 비라는 상반된 기후를 한 화면에 담아내며,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각이 다툼 없이 어우러지는 아나크로니즘의 미학을 완성한다.
나아가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평면 회화의 캔버스를 넘어 레진이라는 입체 매체로 사유의 영역을 확장한다. 작고 단단한 조각 <Space>는 회화 속에서 부유하던 아바타의 초상을 3차원의 물질적 실체로 공간에 내려놓은 작업이다. 은하수가 수놓아진 듯 푸른빛을 머금은 이 작은 두상은 가상의 공간에 머물던 자아가 마침내 물리적 현실의 공기를 호흡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한다. 10센티미터 남짓한 작은 캔버스 위에 색연필과 아크릴로 몽환적인 눈동자를 포착해 낸 연작들과 어우러지며, 전시장은 거대한 기억의 숲이자 다감각적인 조형의 정원으로 변모한다.
이토록 다채로운 조형적 탐구 속에서 작가가 일관되게 지향하는 지점은 감상자와의 정서적 교감이다. 작가는 테크닉의 화려함을 뽐내거나 어려운 개념의 미로 속으로 관람객을 몰아넣지 않는다.
대신 화면을 압도하는 풍부한 색채와 특유의 공기감을 통해 감상자의 마음에 즉각적인 파동을 일으킨다. 예술 작품이 외부 세계의 단순한 복사본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생명력을 지닌 존재라는 객체지향 존재론의 철학처럼, 최은별의 작품들은 관람객에게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 속에 넉넉하게 비워둔 여백과 모호한 경계들은 관람객이 자신의 기억과 상처를 가만히 덧대어 볼 수 있는 따뜻한 쉼터가 되어준다.
결국 최은별이 안내하는 <Sentimental Season>은 모든 것이 복제되고 빠르게 소모되는 차가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인간적이고 다정한 위로다. 기계의 눈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마음의 주름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냄새, 그리고 가슴 저릿했던 계절의 기억들 을 붓끝으로 건져 올린 작가의 캔버스는 우리 각자의 마음을 비추는 맑은 거울이 된다. 바람이 머물다 갈 수 있도록 비워둔 화면의 여백 앞에 서서 가만히 숨을 고를 때, 단단하게 굳어 있던 우리의 마음에도 온기가 스며들며 각자가 지나온 가장 눈부시고 애틋한 계절의 풍경이 다시금 선명하게 피어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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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imental season / 2026 / Acrylic on canvas / 145.5x121.1cm>
<After the storm / 2026 / Acrylic on canvas / 145.5x121.1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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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ful ghost rag / 2026 / Acrylic on canvas / 116.8x72.7cm >
<Glide / 2026 / Acrylic on canvas / 180x8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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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shine & Rain / 2026 / Acrylic on canvas / 116.8x72.7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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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 2026 / Resin / 10x10x20cm>